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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메리칸 클래식의 대명사 폴로 랄프로렌을 창립한 랄프로렌의 성공 스토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평소에 폴로 옷을 좋아하기도 하고, 폴로 랄프로렌의 자수성가 이야기도 굉장히 존경하기 때문에 저번 삼성 이병철 편에 이어서 폴로 랄프로렌 랄프로렌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미국을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를 고르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폴로 랄프로렌을 고를 것이다.

 

가장 대중적이면서 캐주얼과 클래식에 경계에 있는 폴로는 전 세계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브랜드이다.

 

유대인 이민자 가정의 아이 백만장자를 꿈꾸다.

 

 

 

 

랄프 로렌은 1939년 뉴욕 브룽크스(Bronx)의Bronx 유태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성은 리프시츠(Lifshitz)로, 유명한 랍비를 여럿 배출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도 세 아들 중 한 명은 랍비가 되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막내였던 랄프의 관심은 종교가 아닌 경제적 성공에 있었고, 그와 그의 형은 놀림거리가 되었던 성마저도 로렌(Lauren)으로 바꾸었다.

 

 

프레피 룩

 

 

학창 시절 로렌은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친구들의 주목을 받았다. 로렌은 두 형들만큼 잘생기거나 운동을 잘하지도 못했고 집안 또한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는 항상 잘 다린 카키색 바지와 셔츠로 프레피 룩(preppy look: 미국 명문 사립고등학교 학생들의 교복을 본뜬 캐주얼 스타일)을 연출하였다.

 

로렌은 어린 시절부터 성공에 대한 야망이 아주 컸다고 하는데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쓰여있는 그의 장래희망은 백만장자였다고 한다.

 

뉴욕 시립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며 패션 관련 판매원 일을 병행하던 로렌은 학교를 중퇴하고 실무를 통해 경영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링컨대통령은 브룩스 브라더스의 수트를 즐겨입었다고 한다.

 

 

 

그는 트래디셔널 한 스타일의 의복을 생산하던 브룩스 브라더스(Brooks Brothers)를 거쳐 남성 넥타이 제조업체인 리베츠 앤 컴퍼니(Rivetz & Co.)에서 판매원으로 일하였다.

 

미국의 아메리칸 클래식을 대표하는 또 다른 브랜드인 브룩스 브라더스는 미국의 대통령들의 슈트로도 유명하다.

 

 

 

 

남성 넥타이를 판매하던 로렌은 당시에 유행하던 회색톤의 좁은 넥타이가 아닌 넓고 두꺼운 원단에 화려하게 수를 놓은 넥타이를 디자인하였고, 1967년 넥타이 제조업체인 보 브러멜(Beau Brummell)의 도움을 받아 폴로(Polo)라는 이름으로 이 넥타이들을 판매하게 되었다.

 

그 당시 넥타이들은 좁고 어두운 색의 아이비리그 스타일의 넥타이가 유행했었는데, 

로렌의 넓고 화려한 넥타이는 자칫하면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로렌은 넥타이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고 엄청 비싼 가격으로 판매했다.

 

일종의 프리미엄 전략을 사용했다.

 

남다른 디자인과 프리미엄 전략 덕분에 미국의 유명인사들의 눈에 띄게 된 랄프로렌의 넥타이는 금세 상류사회의 상징물이 되었고, 이 덕에 엄청난 속도로 팔려나가게 된다.

 

로렌은 이 넥타이를 통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고 그의 사업의 시작은 넥타이 사업의 성공으로 시작된다.

 

넥타이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로렌은 이듬해인 1968년, 의류로 제품을 확장하여 남성복 라인을 선보였다.

 

그는 기존의 브룩스 브라더스나 멜르단드리(RolandRoland Meledandri)의 트래디셔널 한 스타일과 차별화되는 섹시한 아이비리그 스타일을 발표하였다.

 

폴로 남성복의 인기를 감지한 뉴욕 블루밍데일즈(Bloomingdale’s) 백화점은 로렌의 제안에 따라 폴로의 다양한 제품을 한 자리에서 구매할 수 있는 폴로 바이 랄프 로렌(Polo by Ralph Lauren)의 첫 부티크를 열어주었다.

 

폴로 남성복 라인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70년 로렌은 첫 코티(Coty)상을 수상하였다.

 

폴로 랄프로렌 이름의 시작 

 

 

 

이에 힘을 얻어 1971년에는 여성용 테일러드 셔츠를 출시하였는데, 이는 남성복 셔츠를 여성용 사이즈로 제작한 것으로 소맷부리에 채를 들고 공을 치려는 폴로 선수 모습의 로고를 처음으로 수놓기 시작했다.

 

이 셔츠의 성공으로 폴로 선수 로고는 사회적 지위의 상징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브룩스브라더스의 옥스포드 셔츠

 

 

하지만, 셔츠의 성공은 폴로라는 명칭의 옥스퍼드 셔츠를 1930년대부터 생산하고 있던 브룩스 브라더스와의 법적 마찰을 불러일으켰고, 로렌은 급히 폴로 뒤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폴로 랄프 로렌이란 이름으로 로고를 변경하였다.

 

후에 로렌은 브룩스 브라더스로부터 폴로의 상표 권리를 사들였지만, 오늘날까지도 폴로의 여성복 라인에는 랄프 로렌의 이름이 함께 씌어있다.

 

그는 셔츠의 성공에 힘입어 1972년 랄프 로렌 여성복 라인을 출시하였고, 1976년 여성복으로 두 번째 코티 상을 수상하였다.

 

빠른 스타일 변화를 기본으로 하는 여성복 시장에서의 성공을 인정받음으로써 그는 디자이너가 아닌 재단사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글로벌 스테디셀러 폴로셔츠의 탄생 

 

오늘날 폴로 프레피 룩의 핵심 아이템인 폴로 니트 셔츠는 1972년 처음 소개되었다. 폴로의 니트 셔츠는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변형을 가해 만들어졌다.

 

 

 

 

1960년대에는 30년대의 유명 테니스 챔피언인 르네 라코스테(René Lacoste)가 입었던 피케 니트 셔츠의 변형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라코스테 셔츠는 세 가지 색상으로밖에 출시되지 않았고, 소재도 폴리에스테르와 면 혼방이었다.

 

 

 

 

이 점에 착안한 로렌은 그의 디자인 팀과 아이디어를 모아 면으로 된 폴로 니트 셔츠를 24가지 색상으로 생산하였고, 이는 큰 인기를 끌어 오늘날까지 폴로의 상징적 아이템으로 남게 되었다.

 

영화 의상과 유니폼 디자인 

영화를 사랑했고, 영화에서 많은 디자인 영감을 얻었던 로렌에게 영화 의상을 만들어 제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1974년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 주연의 영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와 1977년 우디 알렌(Woody Allen)의 영화 <애니 홀(Annie Hall)>에 폴로 의상을 제공하였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1974)

 

 

 

로렌은 다양한 종류의 유니폼을 디자인하기도 하였다. 2005년의 US 오픈과 2006년의 윔블던(Wimbledon) 테니스 대회의 유니폼을 디자인하였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미국 올림픽 선수단의 유니폼을 디자인하였다.

 

 

 

 

 

폴로 왕국 사업의 확장

 

로렌은 사업의 확장을 위해 광고를 적극 활용하였다.

 

삭스 피프스 애비뉴가 폴로를 위해 게재한 1975년 뉴욕타임스 전면 광고에 두 명의 여자 모델과 함께 로렌이 처음 등장함으로써 대중에게 그의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어 1977년에는 폴로에서 직접 광고 책자를 만들어 고객에게 배포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책자에 ‘패션이 아니라 스타일이다(Style, not fashion)’라는 문구가 처음으로 등장하여 이후 폴로의 모토가 되었다.

 

 

로렌은 사업을 확장하여 남성복과 여성복 컬렉션 외에도 다양한 패션 및 가정용품 생산을 전개하였다.

 

1976년에는 남아복(Polo for boys), 1978년에는 남녀 향수, 1983년에는 가정용품인 랄프 로렌 홈(Ralph Lauren Home), 1990년에는 남녀용 폴로 골프(Polo Golf), 1993년에는 폴로 스포트(Polo Sport), 유아복, 남성용 캐주얼웨어인RRL, 1994년에는 유러피안 스타일의 고급 테일러링 라인인 퍼플 라벨(Purple Label), 1995년에는 랄프 로렌 페인트, 1996년에는 기존의 랄프 로렌 여성복 컬렉션에 비해 저렴한 여성복 라인인 로렌 바이 랄프 로렌(Lauren by Ralph Lauren)과 젊은이들을 위한 저렴한 가격의 캐주얼웨어 라인인 폴로 진즈(Polo Jeans Co.), 1998년에는 폴로 스포트의 기능성 운동복 라인인 RLX를 출시하였다.

 

 

 

 

이어, 2000년에는 NBC와의 파트너십을 통한 랄프 로렌 미디어(Ralph Lauren Media)와 폴로 닷컴(Polo.com),Polo.com 2002년에는 여성용 트레디셔널 웨어인 블루 라벨(Blue Label), 2004년에는 대학가 근처에서만 판매되는 프레피 스타일인 럭비(Rugby), 2005년에는 남성용 성장 라인인 블랙 라벨(Black Label), 2009년에는 액세서리 라인인 와치 앤 쥬어리(Watch and Jewelry Co.)를 순차적으로 론칭하였다.

 

 

로렌은 사업 확장의 성공으로 막대한 부를 얻게 되었다.

 

2019년 7월 , 포브스는 그의 재산을 65억 달러(약 7조 7천억 원, 세계 215위)로 추정한고밝혔었다.

 

억만장자의 꿈을 이룬 로렌은 수많은 골동품과 고가의 희귀한 자동차를 수십여 대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섯 채의 집과 대규모의 목장을 소유하고 있다.

 

한편 로렌은 뇌종양 수술을 통해 암의 고통을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암 환자를 돕고 자신의 부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연구비를 기부함은 물론 지원 기금 마련을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폴로에 대한 사회적 비판 

 

하지만 일각에서는 폴로의 사업 확장에 대한 사회적 비판도 있다.

 

미디어에서는 폴로의 캐시미어 니트 제품이 현지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 큰 이익을 남기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나아가 폴로가 제시한 프레피 룩은 본래의 프레피 룩의 격을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그의 제품들은 소비자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며 돈을 쓰게 한다고도 비난하였다.

 

이에 로렌은 자신이 스타일의 민주화를 가져왔고, 이러한 비판의 뒤에는 반유대주의가 숨어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폴로는 사내에서 백인 위주의 인종 차별이 이루어졌음이 드러난 바 있다. 이는 폴로가 지향하는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약자로 미국 주류계층을 의미함) 스타일과 연관성을 지닌다.

 

 

 

 

그러나 폴로는 시대적 변화에 편승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광고에 타이슨 백포드(Tyson Beckford)와 같은 흑인이나 장애인 모델을 기용해 다양한 소비자를 겨냥하고 있다.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좋지 않은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씩 이루어 나간 랄프로렌을 보면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결국 세상이 바뀔 수 없다면 세상 탓을 하지 말고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기존의 것의 문제점과 보완점을 잘 활용하여 더 높은 수준의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지금까지 백만장자를 꿈꾸던 유대인 학생에서 아메리칸드림 폴로왕국까지 랄프로렌의 성공스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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