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옹지마 기록소

 

 

 

 

 

 

 

 

 

 

2019년 전 세계 브랜드 가치 순위 5위, 브랜드 가치 913억 달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 삼성을 창업한 인물. 

 

 

 

 

 

 

 

 

 

 

 

이번 성공스토리는 호암 이병철의 이야기이다.

 

앞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이야기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하는데, 제일 처음으로 이병철의 이야기를 골랐다.

 


성장기



이병철은 1910년 음력 2월 12일에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그는 굉장히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경상남도 의령과 진주 지역 일대의 대농토를 소유한 대지 주였다고 한다.



중동중학교에 다니던 이병철은 4학년 1학기 무렵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이병철회장의 젊은 시절

 

 



이병철은 부모님에게 일본 유학을가고싶다고 말했고 그의 부모님은 반대했다.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그러나 이병철은 옆동네에 살던 효성그룹의 창업주 조홍제를 찾아가 일본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조흥제는 흔쾌히 수락했고, 그렇게 그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이병철은 1929년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병철은 일본 유학시절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대학생 이병철은 기업인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참고로 유학 시절 이병철은 꽤 풍족한 생활을 했다.



고향에서 매달 생활비로 200원을 송금해왔는데 이때 당시 일본 중산층 가정의 한 달 생활비가 50원이었다고 한다.



대학교 1학년 때 건강 악화로 병을 치료하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1931년 이병철은 와세다대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병철의 건강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 뒤 고향에서 특별히 할 일 없이 놀고 있던 이병철은 친구들과 노름판에 빠졌다.



그는 후에 그의 회고록에서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웠으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며칠 후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별말 없이 아들에게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받은 사업자금은 지금 가치로 약 3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사업



1936년 고향 친구인 정현용(鄭鉉庸), 박정원(朴正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도정공장과 협동 정미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 쌀 배급제가 시작되면서 그 여파로 정미소 사업이 어려워진 이병철은 정미소, 자동차 회사 , 김해 땅을 모두 팔아 은행 빚을 갚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1930년대, 대구 삼성상회

 

 



2년 뒤 1938년 3월 29세 이병철은 30,000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했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했다. 



1947년에는 삼성물산 공사를 창설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했다.

 

 

 

 



그렇게 사업을 키워나가던 이병철은 1950년 6월 25일 서울에서 한국 전쟁을 맞았다. 



전쟁 직후 피난을 떠났다가 1951년 무렵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면서 1953년에는 제조업에도 투자했다.



1953년에 제일제당, 1954년에 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 영역을 더욱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 경영하였고, 교육사업에도 투자했다.

 

 

 

 



참고로 이병철이 투자한 교육사업의 학교는 성균관대학교다.

 

그 외에도 방송사, 언론사까지 설립하며 승승장구하던 이병철은 위기를 맞는다.



1966년 사카린 밀수가 적발되면서 물의를 빚게 된다.



경영을 떠난 이병철은 2년 뒤 1968년 다시 경영에 복귀했다.



돌아온 이병철은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지금의 삼성그룹을 있게 만든 빅픽쳐의 시작을 알린다.



전기, 전자 분야에 그치지 않고 1974년에는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 공업에 진출하였다. 

 

당시 수출 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추어 전자제품, 화학제품과 중공업 등의 대량 해외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삼성그룹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후에는 용인 자연농원도 설립했다. 나이가 조금 있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용인 자연농원은 이후에 에버랜드로 이름을 바꿨다.

 

 

 

 

 

 



1982년 일흔이 넘은 이병철은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 방문했다. 이병철은 휴렛팩커드 (hp)의 사무실에서 반도체의 위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반도체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핵심 산업으로 부상하리라고 직감했다.

 

 

이병철과 아들 이건희 

 

 



마침 반도체 사업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셋째 아들 이건희가 떠올랐다.



후에 이병철이 사망하고 삼성전자는 셋째아들 이건희에게 상속되었다.



1983년 2월, 일본 도쿄의 오쿠라 호텔. 이병철은 중앙일보 사장 홍진기에게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



“홍 회장, 나입니다.”

 

“아! 예, 회장님! 그곳은 새벽 6시 아닙니까?"

 

"이 시간에 어쩐 일로…."

 

누가 뭐라고 해도 삼성은 반도체 사업을 할 것입니다. 중앙일보에 이 소식을 실어주시겠습니까? 중앙일보를 통해서 세상에 가장 먼저 알리고 싶습니다.”

 

중앙일보는 삼성이 만든 신문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자신이 반도체 사업을 하려는 뜻을 가감 없이 그대로 실어줄 수 있는 중앙일보를 통해서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1983년 3월 15일 자 중앙일보에는 삼성의 새로운 도전을 밝힌 기사가 실렸다.

 

이른바 삼성의 ‘도쿄 선언’이었다.

 

 

 

 

 



삼성의 도쿄선언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냉담했다. 

 

‘인텔’은 이병철 회장을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꼬았다. 

 

심지어 삼성의 임원들과 참모진들 모두도 이병철의 선택을 만류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병철 회장은 담담하게 반도체 사업을 추진했다.

이것이 지금의 삼성전자를 있게 한 이병철의 결단력 있는 시작이었다.

말년

이병철은 1987년 초에 폐암 판정을 받았고 이후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 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1987년 11월 초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하고 같은 달 19일에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소는 현재 용인 에버랜드에 위치하고 있다.

 

 

 

 

 




사람은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운을 잘 타야 하는 법이다. 때를 잘 만나야 하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그러나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한다. 운이 트일 때까지 버텨내는 끈기와 근성이 있어야 한다.
-호암 이병철-

설탕을 팔던 작은 삼성상회에서 전 세계 브랜드 가치 5위의 삼성까지
지금까지 이병철의 성공스토리였다.

 

 

 

 

 

사실 나는 반도체 관련된 일을 하게 되어서 방진복을 입어보았다. 

 

입고 벗는 것뿐만 아니라 입고 있는 동안의 불편함은 정말 크다.

 

물론 아주 가끔 짧은 시간 입었겠지만, 엄청나게 거대한 기업의 CEO가 방진복을 입고 반도체 생산라인에 들어온다는 것은 경영에 대한 의지가 정말 강한 것 같다.

 

물론 보여주기 식일 수 도 있지만 삼성을 만든 이병철도 이어나가는 이건희와 이재용도 대단한 경영자인 것은 틀림없다.

 

나도 이병철 회장의 의지와 겸손함 그리고 결단력을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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